조위 태조 무황제 조조(曹魏 太祖 武皇帝 曹操, 155년 음력 6월 3일 ~ 220년 음력 1월 23일)는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며 시인이다. 자는 맹덕(孟德)이며, 훗날 위가 건국된 이후 추증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이다. 위나라의 초대 황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이지만 실질적으로 위 건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조비의 아버지 조조이다. 후한이 그 힘을 잃어가던 시기에 비상하고 탁월한 재능으로 두각을 드러내, 여러 제후들을 연달아 격파하고 중국대륙의 대부분을 통일하여, 위나라가 세워질 수 있는 기틀을 닦았다. 조조는 삼국지의 영웅들 가운데 패자(覇者)로 우뚝 솟은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는 평가와, 후한을 멸망시킨 난세의 간웅(奸雄)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평가
인물평
능력에 따른 인재 채용
조조는 군사, 학문, 무예, 내정 모두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문, 그림, 노래 등 풍류에도 매우 뛰어났다. 또한 통솔력도 굉장하고 수하를 감동시키는 방법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또한 인격면에서도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에는 파격적인 기준으로 인재를 선발하는 그 기준이 바로 '능력'이었다. 어떠한 분야를 막론하고 한 가지 분야에 뛰어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신분이 아무리 천하다 해도 조조는 크게 인정해줬다. 또한 아내를 고를 때도 능력을 보고 정하였는데, 최하급 신분인 기녀였던 변씨도 능력을 인정받아 아내가 되었다.
단점
하지만 가끔가다 의심이 지나치기도 했다는 것을 결함으로 들 수가 있겠다. 주불의가 위협이 될 것이라면서 또 조충이 죽은 이래로 그를 부릴 자가 없다라는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힘든 이유를 들어 말하면서 주불의를 자기 사람으로 쓰게 해달라는 조비의 간청도 거부하고 주불의를 제거하였다.
그 밖에도 조조 일생 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오점을 남긴 서주 대학살이 있는데, 정사에서도 무려 10만여 명의 민간인들을 조조가 대량학살한 사실을 인정하였으며, 조조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도 맹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만큼 물의를 일으켰다.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조조라는 인물이 굉장히 복합적인 캐릭터성이다보니 그런 포악한 면모도 있어서였을 수도 있으나, 하지말아야할 일을 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조조는 기본적으로 가차없이 냉혹한 면모도 갖추고 있다보니, 자기 아버지의 암살 사건마저 정략도구로 이용해가며 서주를 차지하려던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즘 스타일의 통치자로써 잔혹함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인물인데, 서주 외에도 크고 작은 조조가 일으킨 사건들 대부분이 그러한 조조의 잔학성에서 기인된 것이 많다.
그리고 철저히 겉과 속이 달라서 그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참모나 신하는 극소수였을 정도였는데 순욱이나 곽가, 그리고 사마의같은 책사들 말고는 쉽사리 조조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인물이 드물었고,
이것이 조조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고 그의 패업 성취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진실성이 너무 없다는 혹평도 피할 수가 없다.
이미지
주 문왕을 본받아 자신이 제위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대 조비에 이르러 자신이 지켜온 주공과 같은 이미지를 조비가 이해하지 못하고 한실의 제위를 찬탈했다는 오명이 계속 쫓아다녔고 명분론과 정통론이 득세하던 시기에는 자식의 일로 인해 명성이 더럽혀지기도 하였다. 나관중의 연의에 이르러서는 간교한 악인의 상으로 그려지기도 하였고, 경극 도중 조조역의 배우가 죽는 경우도 있었다.
복권(復權)
현대에 와서는 중국의 모택동(毛澤東)과 곽말약(郭沫若) 등이 조조의 단점을 배제하고 영웅으로서의 진취성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복권에 대한 움직임도 상당히 압도하는 형국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디지털시대를 맞아 삼국지가 수많은 소프트웨어로 판매되는 과정에서 조조 자신의 문무겸전적 인물상은 조비의 일로 인하여 퇴색되지 않고 오롯이 인식되고 있다. 또 조조의 중원 평정을 모티프로 삼는 커리큘럼은 항상 빠지는 일이 없어 '중원 구출'의 분위기는 여전하다.
영화 적벽대전
영화 적벽대전 2에서 조조는 리더십이 뛰어난 지도자로 설명된다. 전염병으로 지친 군인들을 위로하여 전쟁에서의 승리의지를 갖게 한다. 또한 문학에 뛰어나서 조조의 시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였다.
삼국지 조조전
당대의 평가
동시대 사람 중 유명한 두 사람은 조조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양국(梁國) 사람 교현은 천하가 장차 도탄에 빠질텐데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조조라고 평하며 자신의 처자식을 부탁하였고, 여남(汝南) 사람 허소는 ‘청평할 때는 간적, 난세에는 영웅’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인 장제는 참칭 국가의 신하인 신분으로 "위나라 백성들이 조조를 따르는 것은 그 위엄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조조가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진수의 평가
평한다. 한나라 말 천하에 대란이 일어 영웅호걸들이 아울러 봉기하니, 원소가 4주(四州)에서 호시(虎視-범처럼 노려봄)함에 강성하여 대적할 자가 없었으나, 태조가 주략과 지모를 내어 우내(宇內-천하)를 편달(鞭撻-독려)했다. 신불해(申不害)와 상앙(商鞅)의 법술(法術)을 취하고 한신(韓信)과 백기(白起)의 기책(奇策)을 갖추었고, 관직은 재능에 따라 수여하되 각각 그 그릇에 맞게 썼으며, 사사로운 감정을 억제하고 냉정한 계산에 임해(矯情任算)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마침내 황기(皇機-황제의 정무)를 능히 총람(總禦)하고 홍업(洪業-대업)을 이루어낸 것은 그의 밝은 지략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니, 가히 비상(非常)한 인물로 초세지걸(超世之傑)이라 이를 만하다.
후대의 평가
후조(後趙)를 세운 석륵(石勒)은 동탁 암살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반동탁 토벌대의 선봉을 맡았던 위무제와 대승상 조조에게 죽을 것을 두려워하며 임관하고 대신들과 사사로이 교제하였던 사마의를 한데 묶어 평가하길, 저 중화인(=중국인)인 조조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남의 고아나 과부를 속이며 잔꾀를 부리고 온갖 아첨을 일삼으며 천하를 빼앗는 일은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시인이자 정치가였던 두목(杜牧)은 “조공(조조)은 손무의 병법 13편에 주석을 달아 후세에 전했다.”고 하면서 조조의 군사적 재능을 칭찬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조조(曹操)를 간신이라고 하는 것은 봉건정통관념이 만들어낸 것으로 반동사족들이 봉건정통을 유지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 조조의 복권을 말한 바 있다. 그는 조조의 제도 개혁과 둔전제 등의 정치적 공적과 탁월한 군사재능 그리고 조조의 문학 재능을 칭찬하면서 조조를 공식 석상에서만 32번 언급하여 마오쩌둥이 가장 많이 언급한 역사인물이 조조(曹操)라고 한다.
당태종 이세민은 <제위태조문>에서 조조를 평가하고 있다. "위무제는 용맹한 자태를 갖췄고 어려운 시기를 맞아 나라의 동량(棟梁)으로서 이윤(伊尹) 및 곽광(霍光 등의 옛 사람과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천하를 바로 잡은 공이 이들보다 훨씬 컸다."라고 칭송한다. 그러는 한편 "무너지는 것을 보고도 구하지 않았고, 뒤집히는 것을 보고도 붙들지 않았다. 나라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고, 무군(無君)의 행적이 있는 셈이다."라며 신랄한 평을 덧붙인다.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를 옆에 끼고 천하를 호령하면서 내심 새 왕조 개창의 뜻을 품은 것을 비판한 것이다.
연의의 평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악인(惡人)의 상으로 그려지고 있다. 나관중은 조조를 당대의 민중이 가지고 있던 조조에 대한 반감이 들어 있는 전승과 민간 설화 등을 이용하고, 변방 익주(촉)의 인사들을 대부분 우국지사와 충의지사로 묘사함으로써 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조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삼국지연의》 내에서 자아내고 있다. 또한 조조를 악인으로 나타내기 위해 우스꽝스럽고 경망스러운, 때로는 인신모독에 가까운 묘사도 쓰고 있다. 하지만 이문열이 평역한 《삼국지》(민음사)에 나오는 조조는 자신을 위해 죽은 군인들을 위해서 그 가족들에게 밭을 줌으로써 생계에 지장이 없도록 배려하는 훌륭한 지도자로 묘사되며,법을 잘 지킨 지도자였다. 조조는 농민들에게 해를 주지 않도록 말을 타고 보리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그만 자신의 말이 보리를 밟았다. 법을 어김을 부끄럽게 여긴 조조는 자신의 목을 자르려고 하려다가, 참모들의 조언에 따라서 자신의 목을 머리카락으로 대신하니, 군인들은 다시는 법을 어기지를 아니하고 또한 군법을 두려워하였다.
조조의 무덤 진위여부 논란
문물국이 허난성 안양 현 안펑 향 시가오쉐촌에 있는 동한시대 무덤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조조의 무덤이 발굴되었다. 중국 학계에 따르면 무덤의 크기는 지하 15m에 위치한 갑자(甲字)형태의 구조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경사진 내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가면 앞뒤에 규모가 큰 쌍실(雙室)과 4개의 측실(側室)을 갖추고 있었으며 길이 39.5m, 넓이 9.8m에 전체 면적이 740m2로, 그 규모는 비교적 작았다고 한다. 그동안 수차례 도굴됐음에도 이 무덤에서는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 200여 점이 출토됐으며 조조가 사용하던 창과 조조가 사용하던 돌베개등의 명문(銘文)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한 남성과 여성 2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됐는데 이 남성의 유골은 사망 당시 60세 전후였던 것으로 감정되었다. 이는 조조가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는 점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 유골이 조조의 것으로 보고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성급한 결론과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두 비석은 현장에서 발굴된 것이 아니라 공안국이 도굴꾼들을 체포해 압수한 과정에서 가짜가 만들어질 가능성 있는 등 의문을 제기하였다.
조조의 무덤 공식인정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문물국은 "조조의 고분을 발굴하고 학술적인 검증을 거쳐 연구성과를 발표한 절차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고고학계의 규칙에도 부합한다"라고 말하며 조조의 무덤인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하지만 이 발표는 중국 국가문물국에서 중국의 외국인 들에 대한 여행객 유치를 위한 발표라는 설을 아직 많은 사람들이 믿고있다. 따라서 조조 무덤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미궁속에 빠져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A1%B0